글
그저 충분한 대상이라면 맹목적으로 열광하던 그 시절,
나는 슬램덩크에 열광했었고,
마이클조던에 열광했으며,
청춘이라는 정의하에 정당성을 갖고 온갖 비행에 열광 했었다.
그 시절 나는 그것만으로도 살 수 있었다.
20세기의 후퇴와 21세기의 전진을 2년 앞둔 1998년 여름,
나는 교복을 입었고, 고등학생이라는 사회적 신분에 속해있었다.
강렬한 햇빛에 심장 마저 쪼그라들던 그 해 여름에 나는, 그야말로 청춘이었다.
불분명한 미래 따위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오늘 하루 즐기면 그만이었고, 그것이면 충분했으니까.
십년간 해온 운동을 그만두면서도 난 조금의 아쉬움도 갖지 않았고,
십 년, 이십 년의 미래가 아닌, 당장의 내일이 궁금해 미칠지경이었다.
그렇게 나의 소중한 청춘을 좀먹으며, 영원할 것만 같던 즐거움을 맹신했다.
그랬던 어느 날, 목발을 짚은 소녀가 내 눈안에 들어왔다.
앳띤 얼굴에 하얀 피부, 까만 눈동자, 귀여운 단발머리,
자세히 살펴보니 중학생 교복을 입은 소녀였다.
그랬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예비소집일에 모인 중학교 졸업을 앞둔 소녀.
첫 눈에 반한다는 말, 나는 아직도 믿지 않는다.
그 소녀에게 첫 눈에 반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쩐지 묘한 끌림을 느꼈고,
결국 그 끌림은 나를 용감한 남자로 만들고야 말았다.
아마도 사춘기였겠지. 그 시절의 남자란 이성에 목마르기 마련이니까(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무모함으로 무장한 나는 소녀에게 삐삐번호를 건넸고, 당황스러움과 수줍음을 동반한 미소를 띄던 그녀는 흔쾌히 받아주었다.
기뻤다. 처음으로 기뻤다. 다소 무기력했던 그 시절의 내 삶에 강한 자극제 같은 신선함을 느꼈다.
일이 잘풀릴 것만 같았고, 나는 생각보다 많은 기대를 하게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나만의 착각이었음을 난 정확히 일주일 후에 알게되었다.
소녀에게선 어떠한 연락도 없었고, 그때 소녀의 삐삐번호를 물어보지 못한 나를 원망했다.
그래선 난 한 달이란 긴 시간을 참고 견뎌야만 했다. 그 소녀가 우리 학교에 입학하는 날까지.
그런데 참 재미있는건, 1학년들이 입학한 후 줄곧 그 소녀를 찾아 다녔지만 어의없게도 그 소녀의 얼굴이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 아이가 그 아이 같고, 그것은 마치 클론의 습격과도 같은 충격이었다.
시간이 지나감에 나도 지쳐갔고 조금씩 소녀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고 있었다.
시간은 가고 여름방학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당연하다는듯이 여름방학 계획을 세웠다. 물론 학습과는 전혀 무관한 계획이었다.
방학 일주차는 해방감에 술을 퍼부었고, 이주차에는 짐을 싸들고 계곡으로 향했다.
계곡에서 보내는 하루,하루도 별반 다를게 없었다. 마시고, 자고, 마시고, 자고. 이성과 헌팅하고.
그 계곡에서 난, 내 인생 최초의 여자를 사귀게 되었다. 그 소녀가 아닌 동갑소녀와.
우린 오래가진 않았다. 꼬박 백일이란 시간을 사귀었고, 어떠한 스킨쉽도 없었으며,
그녀와의 연애 끝에 남은건, 백원짜리 동전 수백개가 전부였다.
그 이후로 여자를 사귀진 않았고, 그렇게 나는 21세기를 맞았다.
스무살이 되던 여름, 나는 두번째 여자를 사귀었다.
나보다 두 살 아래였던 소녀는, 아직 고등학생이었고, 제법 예쁘게 생긴 아이었다.
우린 꽤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고,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고 있었다.
얼마후 우린 백일을 맞았고, 내 친구들과 소녀의 친구들과 함께 조촐한 백일파티를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난 마치 봉인된 기억이 풀린듯이 몇년전 보았던 그 소녀를 알아보게 되었다.
어전히 앳띤 얼굴, 하얀 피부, 까만 눈동자. 그리고 그땐 알지 못했던 앵두처럼 조그만 입술.
봇물처럼 솟아오르려는 감정을 간신히 추스렸다. 하마터면 그 소녀를 덥썩- 안을뻔했다. 너무도 반가운 마음에.
알고보니 당시 내 여자친구와 절친한 친구였고, 이후로 난 그 소녀를 자주 보게되었다.
나와 내 여자친구와 그 소녀와 소녀의 남자친구와 힘께.
그렇게 일년이란 시간이 흘러갔고, 난 내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지금에 생각해보면 어쩌면 내가 헤어짐을 유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난 지난 일년동안 그 소녀와도 많이 가까워졌기에, 이별의 아픔이란 얄팍한 핑계로 그 소녀와의 만남을 이어갔다.
또 다시 몇달후 그 소녀도 남자친구와 헤어졌고, 난 무척 기뻤다.
우린 동병상련이란 목적하에 더 자주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20세기를 떠나보낸지 일년이 되던 날, 난 소녀에게 고백을 했고, 소녀도 흔쾌히 승낙했다.
그렇게 꼬박 칠년이라는 시간동안 우린 연인이란 이름으로 만났고, 헤어졌다.
그리고 오늘 그녀의 결혼소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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