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마음의 풍금. 2014. 4. 16. 21:58

“ 그녀에게는 늘 마늘향이 났어요. 전 그게 싫었습니다. 서울에서 자란 여잔데 처음 만났을 땐 풋사과 같은 향이 좋은 그런 여자였어요. 무슨 악연으로 날 만나 곱던 손으로 호미 잡고 낫질하며 산 세월이 강산 서너 개는 변했을 겁니다.
그래도 신혼땐 참 금슬 좋은 부부란 소리도 들어가며 딴에는 재미지고 깨소금 볶아가며 행복했던 시절도 있었어요. 산중 생활이란 게 외롭고 고독한 것이라서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되거든요.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의지해가며 제법 긴 시간을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전부에요. 그 시간이 우리가 사랑한 전부의 시간입니다.
저기요 선생님, 저 이 여자 꼭 살려야 합니다. 반드시 살릴 겁니다. 그러려면 선생님의 도움이 간절합니다. 할 수 있는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돈이라면 충분합니다.
선생님의 의사 인생에서 서툰 시절 누군가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제 아내에게 갚으시고요. 살아오면서 사소하고 대범했던 모든 잘못들을 이 사람에게 사죄하세요. 우리가 사랑을 하고 고통을 받으며 지내온 시간만큼 당신도 의사로써 명예로운 시간을 보내왔다면.
부탁합니다. 당신의 모든 노력을, 당신들의 모든 실력을 여기 이 불쌍한 여자에게 쏟아주세요. 부탁합니다. “

 

적당한 키에 적당한 몸집, 세월을 가늠케 하는 백발의 중년 남성, 허름한 차림새가 그간의 생활고를 말해주듯 숨길 수 없는 초췌함이 더욱 그의 말에 애절함을 실어 준다.
6인실 병동 창가에 자리한 병원침대에 누워 표정 없는 얼굴로 창 밖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 박아람. 중년 남성의 아내이다.
아람은 말을 듣지 못한다. 세월의 벌이라는 표현이 맞을까? 인연을 거스른 여자의 말로가 옳을까, 벌써 8년째 투병중이다. 멀쩡하던 여자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고 말을 잃고 생각을 잃는다는 것이 스스로에게도 엄청난 고통이겠지만 반려자로써 원인도 병명조차도 몰라서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는 아내를 그저 바라만 봐야하는 남자의 마음이란 심장에 소금을 뿌려 놓은 것처럼 쓰리고 아픈 것이다.

 

“ 아버님, 의사라는 직업이 참 그렇더군요.
‘죄송합니다, 유감입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말을 정말 많이 하는 직업입니다. 아버님께만 이천구백 번쯤 했을 겁니다.
이 병원에 박아람 환자분 같은 분들이 몇이나 더 있는지 아십니까? 저희 병원 중환자실 환자분들중 사연 없는 분들 없습니다. 보호자들 역시 저에게 각자의 사정을 호소합니다. 저는 늘 그 분들께 ‘죄송합니다, 유감입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란 말 밖에 드릴 말이 없습니다.
그만큼 제가 미안해야할 환자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언제나 최선이지 않은 적 없습니다. 언제나 최선 이였지만 언제나 전 그런 말들을 해야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유감입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
앞으로 전 아버님께 삼천 번, 사천 번. 더 많은 사과를 하겠습니다. 박아람 환자분의 병, 아시다싶이 현 의학으로는 판단하고 치료할 수 없는 병명조차도 모르는 불치병입니다. 얼마나 더 사과를 하고 얼마나 더 의사로서의 좌절감을 느낄진 모르겠지만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의사로써 제가 할 수 있는 진단입니다 “

 

의사 무리들중 가운데를 차지한 병원 원장의 말에 모두가 숙연해 진다. 의사 무리 가장 자리에 서있는 이십대 중반 정도 보이는 앳된 간호사. 유독 공감하며 콩알만 한 눈물이 가지런히 모은 손등 위로 똑,똑 떨어진다.
주해연. 바로 남자의 딸이다. 무남독녀, 아람의 외동딸이다.

 

의사 무리들이 나가고 해연만 남아있다.

 

“ 박아람 환자분, 맥박 좀 잴게요 ”

 

굉장히 차갑고 사무적인 말투다. 그러나 남자의 얼굴엔 화색이 돋는다.

 

“ 아이쿠, 우리 해연이 왔니? ”

 

과장된 몸짓으로 해연을 반기는 남자와 달리 해연은 대답은 않고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묵묵히 제 일에만 집중한다. 그 모습에 남자는 체념하듯 알겠다는 듯 자리에 앉아 책상 서랍을 뒤적인다.

 

“ 옜다 ”

 

남자가 포장된 작은 선물을 건넨다. 해연은 흘깃 보고는 다시 제 할 일만 한다.

 

“ 오늘이 생일이잖니 ”

 

“ 박아람 환자분 맥박 정상이시고 혈압은 어제 보다 조금 높게 나왔네요. 오후에 다시 한 번 재는 걸로 할게요 그럼, ”

 

남자의 말에는 대꾸도 않고 간호사로서 환자를 대하는 말만 하고는 돌아 서는걸 남자가 잡아 세운다.

 

“ 이 손 놓으시고요 제 말 똑똑히 들으세요 주해연씨가 전해달랍니다. 행여나 오늘 생일 선물을 챙겨 주거든 어울리지 않는 짓 역겨우니까 이 손 치우시고 하던 데로 하시라고요 ”

어떤 대꾸도 못하고 남자의 눈에는 속죄의 눈물만이 흐른다. 애비로서 남편으로서 가장으로서 자신의 지난날을 누구보다 통감하고 후회하는 남자였기에 딸 해연이의 원망과 분노가 어느 정도일지 잘 알고 있다. 아내의 병의 원인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해연의 주장에도 전적으로 인정하는 남자였다.

 

“ 아, 그리고 보호자? 대체 누가 누구를 보호한다는 거죠? 감히 누구를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이던가요?
착각하시나본데 그쪽은요 파괴자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에요 아시겠어요? 그러니 이제 본인의 역할에 충실해 주시죠?.. 이 말도 전해 달라네요.. ”

 

서운하지 않다. 조금도 서운하지 않다. 그저 미안할 뿐이다. 고왔던 아이가 순수하고 착했던 아이가 애비의 그늘 없이 모진 세상을 살아내기엔 너무도 버거웠겠지.
지난 세월 자신이 돌봐주지 못했던 시간동안 아이는 살기위해 스스로 변해왔겠지. 모든 게 다 업보고 순리다 생각하니 죄책감에 눈물이 나고.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혀 놓은 아이의 투정 같아서. 나 힘들다고 좀 도와달라는 구조신호인 것만 같아서. 그런 해연이 가여워 가슴에 피눈물이 난다.

 

*

 

오전에 남자에게 그러고 나와서는 하루 종일 일이 잡히지 않는 해연이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약이 올랐다. 집을 나간 지 십 년 만에 돌아와서는 이제와 남편 노릇 아버지 노릇 하려는 꼴이 역겨웠다.
해연은 십 년 전 남자가 떠나던 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정확히 이만 팔천 원을 쥐어주면서 ‘ 아껴뒀다가 맛있는 거 꼭 먹고싶은거 생각날 때 사먹어 아저씨는 이제 너 아빠 안 해 ’ 라던 그 뭐 같던 말. 그렇게 떠나갔으면서, 그간 가슴에 당신 이름자를 새기며 평생을 증오하리라 다짐했는데. 일 년 전 뜬금없이 나타나서는 이제와 아버지이길 바라는 것만 같아서 더더욱 용서 할 수 없었다.

 

“ 주쌤, 주쌤 ”

 

“ 네? 응? 아, 응.. ”

 

“ 뭐야, 왜이래 하루 종일 멍때리고. 남친한테 차였니? 자, 이거 ”

 

생각에 잠겨 있던 해연에게 동료 간호사가 불쑥 건네는 그것, 바로 아침에 남자가 주려던 생일선물이다.

 

“ 이걸 어떻게.. ”

 

“ 몰라, 아까 어떤 분이 놓고가셨어. 누구냐고 물었는데 대꾸는 않고 자기 오면 주라면서.. 근데 자기 오늘 무슨 날이야? ”

 

건네받은 선물을 쓰레기통에 확 처박고 싶은걸 주변의 눈도 있고해서 꾹 참고 서랍장에 던져 놓았다.

그 날 저녁. 시계 바늘이 자정이 되어 가지만 해연은 아직도 퇴근 전이다. 오늘 근무가 이브였기에 벌써 11시에 퇴근을 해야 했으나 나이트 근무였던 동료 수진의 시아버님이 갑자기 쓰러지셔서 오늘 오후에 해연이 근무하는 병원으로 입원하셨다. 대학교부터 절친했던 사이였기에 교대하러 온다는걸 극구 말리고 대신 근무를 하고 있는 중이다. 솔직히 조금은 후회하고 있는 중이지만 그럴 수 도 없는 것이 해연의 엄마, 아람이 병원에 처음 입원했던 해에 돌봐줄 사람이 없어 해연이 늘 애를 먹었는데 그럴때마다 대신 근무를 서준 것이 수진이었다. 해연에겐 자신의 과거를 숨길 수 있는 유일한 친한 친구였다.
오늘 따라 조용한 병동 탓에 지루함에 피곤함까지 몰려오던 차에 문득 서랍에 쳐 박아 놓은 남자의 선물이 생각났다. 몇 번을 망설이며 주저하다가 ‘보나마나 형편없겠지만 어떤 취향인지나 보지 뭐’ 하는 마음에 포장지를 뜯으려다 아무도 없는 데스크에 혹여나 누가 볼까봐 마치 훔친 물건을 살피듯 책상 밑으로 가려서 조용히 뜯어보았다.
포장지를 뜯으니 아무런 상표도 없는 작은 상자가 나오고 상자를 열어보니 촌스럽고 낡은 머리핀이 있었다.

 

“ 쳇, 수준하고는.. ”

 

해연은 어쩐지 불쾌했다. 아마도 속으로 기대를 했는지 실망하는 표정을 스스로에게도 들키기 싫어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남자의 선물 고르는 수준을 비아냥댔다.
사실 그것은 남자가 해연에게 주는 생애 첫 선물이기도 했고 해연 인생을 통틀어 처음 받아보는 생일 선물이었다. 친구가 없던 해연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싶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엄마인 아람마저도 해연의 생일날을 축하해주지 않았다. 도리어 생일날이면 평소와 달리 유독 짜증을 내곤 했었기에 해연은 자신의 생일을 굳이 챙기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해연은 늘 선물에 익숙하지 못했고 언젠가 남자친구가 준 작은 선물에도 무척이나 감동해 남자친구가 도리어 민망해했던 적도 있다.

 

“ 어이 주충이씨 뭐하시나요? ”

 

갑자기 찾아온 수진의 방문에 깜짝 놀란 해연이 악- 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 모습을 본 수진은 웃겨 죽겠다는 듯 깔깔 대며 크게 웃는다.

 

“ 뭘 그렇게 놀라시나 주충이씨? 불어, 뭐했어? 너 몰래 남자 벗은 사진 봤지? ”

 

주충이는 수진이 해연에게 붙여준 애칭이다. 눈썹이 송충이 같다며 처음 봤을 때부터 그렇게 불렀고 그에 대응하듯 해연은 수진에게 박장녀씨라는 애칭을 붙여줬다. 뜻인 즉, 평소 명품을 좋아하고 사랑 따윈 필요 없고 그저 돈 많은 남자에게 시집 가리라며, 이른바 된장녀가 꿈인 수진이었기에 박장녀라고 불렀다. 참고로 수진은 소원을 이뤘다.

 

“ 보긴 뭘봐. 이 야심한 밤에 갑자기 툭 하고 나타나면 놀라지 않겠습니까 박장녀씨? ”

 

“ 아, 그렇습니까? 그럼 잠시 수사를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주충이씨? ”

 

갑자기 나타난 수진의 방문에 지루하던 참에 반가웠는지, 수진 역시 시아버님 간호하며 그 무거운 병실 분위기에 힘들었는지, 해연과 수진은 연실 농담 따먹기에 재미있어 한다.

 

“ 어이구 어이구, 이거 이거 아직도 미련 못 버렸네 야, 그만하면 그것도 병이다 병 ”

 

해연의 비아냥거림에 수진이 이게, 하며 욱하지만 해연은 아랑곳 않고 재밌다며 연실 샐쭉 거린다. 사실 수진의 어릴 적부터 꿈은 멋진 여형사가 되는 것이 였었는데 다리에 알통 생기면 예쁜 힐을 신을 수 없지 않겠냐며 생각 없이 내뱉은 해연의 말에 너무도 쉽게 포기해버려 그 당시 해연을 당황하게 한 적이 있다. 그 날 이후로 박장녀의 꿈을 가진 것이다.

 

“ 근데 그건 뭐야? 웬 삔? ”

 

해연의 손에 들린 삔에 수진이 눈이 똥그래져 묻는다. 평소 해연은 꾸밈과는 거리가 멀고 그 흔한 로션 하나 바르지 않는 선머슴 같은 여자였기에 삔을 들고 있는 해연의 모습은 수진에겐 충격이라 할 수 있다.

 

“ 아. 이거? 주웠어 ”

 

순간 당황한 해연은 지 애비의 첫 선물을 주웠다라고 표현 한다. 어쩐지 마음이 불편하지만 뭐 어때라는 마음으로 불편함을 지운다.
귀엽다며 해연의 손에 들린 삔을 옮겨 잡으려던 수진의 손짓에 해연이 순간 움찔하며 손을 빼려다가 응? 하며 토끼 눈을 한 수진에게 건네준다.

 

“ 이거 나 주라. 주은 거라며? 너 어차피 삔 같은거 안하잖아 ”

 

“ 그래 가져. 쓸 일도 없는데 뭐.. ”

 

“ 땡큐, 근데 이거 굉장히 오래됐나봐 군데군데 칠이 벗겨졌네.
이거 혹시 잃어버린 누군가에게는 엄청 소중한 거 아닐까? 이를테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겨 준 유일한 유품 같은거 있잖아 왜 ”

 

수진의 말에 해연은 어쩌면 하고 속으로 생각한다. 그제야 남자가 자기에게 왜 이런 낡은 삔을 줬지 생각해 본다. 혹시나 하고 생각해 보지만 해연의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삔이다. 하지만 뭔가 찜찜하다. 며칠을 양치질을 못했다가 양치질을 했을 때 개운하지 않는 것처럼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다가 결국은 남자의 생각으로 이어진다는 것에 표정으로 불쾌함을 보이며 제 머리를 툭 하고 밀어 친다.
그런 해연을 지켜보던 수진은 쯧쯧 혀를 차며 손가락으로 제 관자놀이 주위를 빙빙 돌리며 말한다.

 

“ 이보세요 주충이씨? 제발 좀 병원에 좀 가보셔요. 뭐 병원이 멀기나 멀어? 몇 정거장, 몇 시간도 아니고 고작 계단 몇 계층, 오 분만 올라가면 정신병동이거든요. 오 분의 노력으로 남은 생이 편해진다는데 왜 말을 안 들어 안듣긴 ”

 

수진의 장난기 가득한 비아냥거림이 해연은 늘 듣기 좋다. 친구가 없던 해연에게 수진은 첫사랑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성에 눈을 뜨는 사춘기 시절에 해연은 의무적인 학교 공부에 수학 공식을 고민하기 보단 방과 후 먹고 사는 문제에 더 집중하며 고민해야 했지만 대학과 생계,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 당시 해연이 생각하는 유일한 출구는 대학이었고 대학 졸업 후 좋은 회사에 취직하는 것이 해연이 생각하는 유일한 해답이었다. 그런 해연에게 소녀감성은 사치이고 죄악이었다. 그렇게 외롭고 고독한 길을 걷고 또 걷고 걸어 해연이 대학이라는 출구에 섰을 때 그 기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 하나 없다는 현실에 자괴감에 빠진 해연에게 친구 하자며 손을 내민 것이 수진이다. 그러니 해연에게는 수진이 첫사랑이 맞다. 애틋하고 아련하고. 뭐 그런 우리가 아는 첫사랑과는 조금 다른 가깝고 친근한 그런 첫사랑.

수진이 돌아간 뒤에 남은 정적은 더욱 고요하고 외롭다. 정적, 고요함, 외로움에 배고픔이 더해져 짜증이 난 해연. 사실은 아까 자정에 나온 간식 겸 식사를 수진이 와서는 한 끼도 못 먹었다며 먹어치우는 바람에 해연은 저녁식사를 거른게 되었다. 망할 년, 하고 괜한 욕을 해본다.

 

*

 

그 시간 병실 안에선 남자가 아람의 손을 잡은 채로 석상이 되었는지 움직이질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다. 십 년 만에 돌아와 만난 아내의 모습이 불치병 환자라니, 남자는 그 날 이후로 단 한 번도 누워서 자는 적이 없다.
지난 세월 외면했던 시간들이 날카로운 송곳으로 되돌아와 하루에 수백 번씩 가슴을 찌른다. 상처가 아물 새 없이 찌르고 찌르고, 차라리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났으면 싶을 때도 있다. 그래서 아픈 가슴 없이 이 여자를 다시 사랑하리라, 그것은 남자의 속죄와도 같은 간절한 소망이었다.
돌이켜 보면 남자가 가족을 외면한 세월동안 남자도 편한 생활을 한건 아니었다. 늘 건조되지 않은 젖은 빨래처럼 눅눅한 인생이었다. 하늘 아래 누울 곳 없이 정처 없는 세월의 연속, 전국을 떠돌며 자신을 책망하고 거침없는 행동으로 스스로를 자학하며 흐르는 세월에 순응하지 못한 체 할 수 만 있다면 세월을 거스르고 싶었다. 아람을 원망하고 모든 이유와 책임을 아람에게만 물으며 그렇게 하루하루 자신의 것을 내려놓았다. 그랬던 남자가 가족에게 다시 돌아온 이유는 단 하나다.
십 년의 방황 끝에 남자는 보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평생을 증오하리라 다짐하며 떠나온 아람의 품 이었는데 어느 날 문득 아람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 하루 종일 생각을 하다가 다음 날이 되어서야 생각이 난 적이 있다.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그 날 이후로 그리움이 커지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보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나이가 들어 자제력을 잃은 건지, 먹이를 앞에 둔 늑대의 마음이었을까? 들끓는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남자는 다시 아람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아람은 더 이상 남자를 반겨주지 못했다.

 

“ 당신, 내 말 들려? 난 당신이 듣는다고 생각해 숨은 쉬잖아. 생각도 하고 볼 수 도 있잖아? 난 당신이 일부러 마음을 닫고 입을 닫고 사는 것만 같아 내가 너무 미워서, 사람이 미워서. 기다릴 거야, 참고 기다릴게. 당신이 버틴 세월보다 더 오래오래 버틸 거야. 언젠가 당신이 일어선다면 그때 얘기할게. 십 년 전 그 날, 내가 하지 못했던 나의 진심을 말이야 ”

 

삶의 흔적으로 깊게 패인 남자의 손 주름 사이로 굵은 남자의 눈물이 풍덩 하며 눈물 웅덩이를 만든다. 들썩 거리는 어깨 떨림이 거세지고 병실 안에 남자의 애절함이 가득하다.
병실 밖 복도에서 병실안을 훔쳐보는 이가 있다. 바로 해연이다.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한참을 바라만보고 있다.

 

[ 세상을 사는 긍정의 힘은 자기 자신보다 당신의 삶 자체를 바꿔 놓는다
  사랑 받기를 갈구하지 말고, 먼저 사랑을 베풀어라,
  떨어지는 낙엽조차 너를 위해 노래하리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다
  사람을 죽게하는 병은 절망,

  죽지마라, 당신 또한 내가 사랑하고픈 사람이다
  

  힘들어하는 당신께. ]

 

언젠가 봉사단체에서 보내 준 희망 메시지가 담긴 엽서를 본 적이 있는데 엽서에 어느 이름 모를 시인의 글을 보고는 가슴에 와닿았는지 남자는 그 날 이후로 버릇처럼 외우며 말한다. 읊조리며 애절함을 담아 간절함을 노래 하듯이 말이다.

살짝 열어둔 창문 틈 사이로 서늘한 밤 바람이 도둑 걸음으로 들어와 아람의 머리를 스치고 남자의 마음을 스치고 벽에 걸린 달력을 넘긴다.

 

[ 1978년 4월 27일 ]

 

 

'내 마음의 풍금.' 카테고리의 다른 글

#  (0) 2014.04.16
#  (0) 2014.04.15
#  (0) 2014.04.12
, .